조선 - 양난 이후

[영조]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 정치가 불안해지자, 탕평책(정치 세력 간 균형 유지) 실시했다.
        탕평파를 육성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붕당의 뿌리를 없애기 위해 재야(민간)에서 공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붕당의 기반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3사의 관리를 추천하는 관행을 없애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군역 부담을 덜어주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했다.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도 편찬하여 문물제도(문화 제도)를 정비했다.

탕평비(서울 종로)
탕평비(서울 종로)

│두루 사랑하고 편당하지 않는 것은 군자(君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당하고 두루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소인(小人)의 마음이다.

편당: 한 당파에 치우치는 것

 

[정조] 외척의 힘이 강해지자, 외척 세력을 억누르고 능력 있는 사람을 고루 등용했다.
        규장각(왕실 도서관)을 설치하여 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구로 삼았다.
        ※초계문신제를 실시해 개혁 세력을 육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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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계문신제} 젊고 재능 있는 관료들을 선발해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한 제도


        장용영(친위 부대)를 설치해 왕권을 뒷받침하고, 수원에 화성을 건설해 개혁 정치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다.

        시전(왕실 상점)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여 사상(개인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했다.
        서얼(양반 자녀 중 중인)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문서 관리)으로 등용했다.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법령을 정비했다.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일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 세도 정치가 나타났다.
순조, 헌종,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이어지며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 기강이 크게 문란해져 비리, 부정, 뇌물 등이 일어났다. 돈을 주고 관직을 산 관리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조선 - 신분과 화폐

조선의 신분 구성

 

양천제(법제적)   반상제(사회적)
양인 지배층 [양반] 문반·무반(관료 계층)
피지배층 [중인] 서리(글), 향리(하급 관리), 기술관, 서얼(첩)
[상민] 농민, 수공업자, 상인
천인 [천민] 노비, 백정, 무당, 광대
  • [양반]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국역을 면제받는 등 정치적 특권을 누렸다.
  • [중인]
        기술이나 행정 실무 능력의 전문성으로 직역이 세습되었다.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서얼은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 [상민]
        [농민] 주로 조세·공납·역의 부담을 졌다. 법제상 과거를 볼 수는 있었다.
        [수공업자] 대부분 관청에 소속되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다.
        [상인] 정부의 허가를 받아 상거래 활동을 하였다.
        수군(해군), 역졸(역 관리) 등 천한 일을 담당하는 계층을 '신량역천'(분은 인, 할은 인)이라 하였다.
  • [천민]
        노비, 백정, 광대, 무당 등이 해당한다.
        노비는 재산으로 취급되며, 부모가 노비일 경우 자녀도 노비가 되었다.
        노비는 공노비(왕실 소속)와 사노비(개인 소속)가 있다.
        사노비 중 외거 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며 재산을 가져, 농민과 처지가 비슷했다.

 

15세기 중반 이후, 지방에서는 유력 양반(사족)이 중심이 되어 향촌 사회를 운영했다.
사족들은 유향소를 만들어 수령을 보좌하고, 백성을 교화했다.
사족들은 향회(양반의 지방지배 기구)를 열어 결속력을 다지면서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사림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자 서원(사립 교육 기관)이 세워지고, 향약(마을 내 약속)이 보급되었다.
사족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권위를 강화하였다.
사족들은 향약을 운영하여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고 농민을 교화하였다.
향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산림이 형성되었다.

사족들은 집안에 가묘(임시 무덤)를 세워 제사 지내고, 족보를 편찬하였다.
사족들은 『주자가례』의 보급에 힘써 향촌에 성리학적 윤리를 확산하려 했다.

이황의 예안 향약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가문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자,
일이 관청(정부)에 간섭되고 향촌의 풍속에 관계되는 자,
위세(권력 남용)를 부려 관(정부)을 흔들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
향장(지역 사회의 지도자)을 능욕하는 자,
수절(신념을 지킴)하는 부인을 유인하여 더럽히는 자 등
7항목은 극벌에 처한다.

 


 

조선 - 경제 발달

조선은 건국 초부터 농업을 장려하였다. (사농공상: 선비, 농민, 수공업자, 상인)
세종 때에는 『농사직설』을 간행했다.


양난 이후, 모내기법(이앙법)이 확산되었다.
수리 시설이 늘고, 노동력을 절약해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늘려 주었다.

광작(경작지 확대)으로 일부 농민은 부농이되고, 대부분은 빈농이 되었다.
지방에서는 소작농들의 지대(땅값) 납부 방식이 타조법(n%)에서 도조법(n개)으로 바뀌어 갔다.
소작농 부담이 감소하고,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가 경제적 계약 관계로 변화하였다.
일부 농민은 <인삼, 담배, 채소> 등 상품 작물을 재배하였다.


조선 후기,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자,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 선대제 수공업: 상인 자본의 지원을 받고 제품을 만듦
  • 공장제 수공업: 임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

광업 분야에서도 민간 광산의 채굴이 이루어지고,
덕대(광산 개발 전문 경영인)는 상인 물주의 자금으로 채굴업자, 채굴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산을 운영하였다.


  • 대동법 실시 이후 정부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층]이 성장하였다.
  • 상품을 싼값에 독점적으로 사서 비싼 값에 판매하는 [도고]가 등장하였다.
  • [보부상]은 장날의 차이를 이용하여 장시를 이동하여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었다.
  •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상]들이 등장하였다.

 

박지원, 『허생전』
허생은 만 금을 얻어 생각하기를
"저 안성은 기(畿)․호(湖)의 어우름이요, 삼남의 어귀이다."
하고는 이에 머물러 살았다.
그리하여 대추, 밤, 감, 배, 석류, 귤, 유자 등의 과실을
모두 두 배 값으로 사서 저장하였다.
허생이 과실을 몽땅 사들이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치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지 얼마 아니 되어서 배 값을 받은 장사들이
도리어 10배의 값을 치루었다.

 


 

신분 질서의 변화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빈부격차가 발생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에 영향을 주었다.

  • [양반]
        일부 양반은 농민과 처지가 다를 바 없는 잔반으로 몰락하였다.
  • [중인]
        서얼들은 집단 상소 운동을 펼쳤다.
        정조가 유득공, 박제가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하기도 했다.
        기술직 중인들도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중인의 신분 상승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상민]
        일부 농민은 광작으로 부농이 되어, 양반으로 행세하였다.
        - 납속: 죄를 면하고자 금전을 바치는 것
        - 공명첩: 군량을 모으기 위한 임시 관직 임명장
        다수 농민들은 소작농, 임노동자, 영세 상인으로 몰락하였다.
  • [천민]
        노비들은 도망가서 양인 행세를 하거나, 납속책이나 군공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하였다.

 

양반이 늘고 상민과 노비의 수가 줄었다.
영조 때 노비종모법(천인+양인→양인)을 실시하고, 순조 때 공노비들을 해방하였다.
전통 사족인 구향과 신분을 상승한 신향 사이에 향전이 일어났다.
지방관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향을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수령의 권한이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