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멸망

 

 

신라 말, 사회가 혼란해지자 ※호족이 성장하고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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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족} 지방세력

 

 

[견훤]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궁예]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이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왕권을 강화하고자 호족을 탄압하고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였지만,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왕건]으로 추대하였다(918).



[왕건] '고려'라는 국호를 회복하고 연호를 천수로 정한 뒤,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겼다.

호족 세력을 포섭하고 신라와 화친하여,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후백제에서 왕위 다툼으로 [견훤]이 귀순하고, 신라의 [경순왕]고려에 통합을 요청하였다(935).

그렇게 고려군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고려 -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

 

[왕건]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발해 유민을 포용하며 거란을 배척했다.

        신라후백제 출신 인물을 지배층으로 받아들이며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했다.

[광종]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과거제를 도입했다.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

[경종] 전시과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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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과} 밭(田)과 땔감(柴)을 나눠주는 규정(科)



[성종] 최승로의 의견을 수용하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정치를 실시했다.

        의 제도를 바탕으로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국가 행사에 유교 의례를 도입했다.

[현종] 폐지된 팔관회를 다시 개최했다.

 


 

고려 - 통치 체제

 

성종의 중앙 관제인 2성 6부

 

고려는 2성 6부의 중앙 정치 제도를 갖추었다.

중서문하성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상서성이 6부를 관리하며 정책을 집행했다.

비서 기구인 중추원, 감찰 기구인 어사대, 화폐와 곡식 출납을 담당하는 삼사가 있었다.



도병마사식목도감에서 회의를 열어 정책을 결정했다.

어사대의 관리는 대간이라 불리며, 의 관리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서경권을 가졌다.

 


 

12목 3경 / 경기와 5도 양계



고려 건국 초기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중앙 관리를 출신 지역의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성종12목을 설치했으며, 이후 전국을 경기, 5도와 양계로 나누어 통치했다.

5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여 도 아래에 주, 군, 현을 두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는, 북계와 동계를 두어 병마사를 파견하고 진을 설치했다. 



지방관이 ※주재하는 ※고을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을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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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재} 직무상으로 파견되어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

 

※ {고을} 주(州) · 부(府) · 군(郡) · 현(縣)의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

 



중요한 주현(州縣)계수관이 되었고, 특수 행정 구역인 향·부곡·소 등이 있었다.



고려는 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리를 등용했다.

※명경과, 잡과, 승과, 제술과가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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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경과}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 능력을 시험함

※ {잡과}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적인 기술을 담당함

※ {승과} 불교 행정을 담당하는 승직자를 뽑음

※ {제술과} 문학적 재능과 정책(=글짓기)으로 인재를 뽑는 시험



5품 이상 고위 관리의 자손은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고려 - 국제 관계

 

 

왕건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를 적대시하며, 중국의 한족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였다.

북방의 여진에게는 회유와 토벌 정책을 함께 펼쳤다.

이후 들도 대외 정책을 계승하였다.

[정종]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광군을 편성하고, 여진에게는 공물을 받고 물품을 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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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군} 농민으로 편성된 예비군사조직

 





고려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자 거란 1차 침입하였다(993).

고려거란과 교류하기로 약속하고, 압록강 일대의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이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현종이 즉위하자 거란이 2차 침입하였다.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로 피란하여 거란군은 소득 없이 물러났다.


이후 거란이 3차 침입하였으나, 강감찬거란군을 격파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거란의 침입을 물리치자, 여진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복속할 것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강성해진 여진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예종윤관※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천리장성 밖 동북 지역에 9개의 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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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무반}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임시 군사 조직

 



그러나 이후에는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고려 - 내란

 

고려의 통치 체제가 안정되면서 문벌이 형성되었고, 점차 보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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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벌}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여진 정벌이 실패하며 보수적 문벌 세력이 더욱 강해졌고, 이자겸이 왕실의 외척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인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이자겸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궁궐을 불태우고 왕위를 넘보았다(이자겸의 난, 1126).

이 무렵 이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이자겸 등의 주장에 따라 고려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왕권의 위협을 느낀 인종이자겸에 반대하는 문벌 세력의 협조를 얻어 이자겸을 몰아냈다.



이후 금에 대한 ※사대에 반대한 인물들이 ※칭제건원을 주장하며 ※자주적 세력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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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

 

※ {칭제건원}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선포하는 것

 

※ {자주적 세력}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집단

 

 

인종윤언이, 묘청, 정지상 등과 ※풍수 도참사상을 내세워 서경으로 천도하고 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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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 도참사상} 자연 환경으로 운명을 예측하는 사상

 

 

하지만 인종서경 천도를 포기하자 묘청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서경 천도를 지지한 정지상을 제거하고 윤언이마저 쫓아냈다.


 

중앙 지배층이 문신(정치 세력)을 우대하고 무신(군인)을 차별하면서,

정중부이의방 등이 무신 정변을 일으켜 무신 정권을 수립하였다(1170).



초기에는 최고 회의 기구가 된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집권자가 자주 바뀌었고, 농민과 천민이 봉기했다.



[최충헌] 정권을 잡고 ※도방을 확대하였고, ※교정도감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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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방} 사병 집단

 

※ {교정도감} 최고 권력 기관



[최우]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하고, ※서방을 두어 능력 있는 문신들의 자문을 얻고, ※야별초를 조직하여 정권을 보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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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방} 사설 정치 기관

※ {서방} 임시 국가 기관

※ {야별초} 도적진압 방범대

 


 

무신 정권이 안정될 무렵, 몽골고려는 국교를 맺어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몽골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했다.

몽골은 자기 나라 사신이 귀국길에 살해당한 것을 빌미로 고려침입했다.

최우는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몽골이 항복 조건을 낮추어 제시하자, 무신들이 최씨 정권무너뜨리고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

이후 원종무신 정권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원종몽골의 지원을 받아 개경으로 ※환도했다.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였으나 고려몽골의 연합군에게 진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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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돌아옴

※ {삼별초} 무신 정권의 특수 군대

 


 

고려 - 원 간섭기

 

고려원(몽골 계승)과 강화를 맺은 이후 간섭을 받았다.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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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행성} 몽골이 설치한 지방 행정 기구

※ {다루가치} 몽골의 관직명

 

또한 화주에 쌍성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다. (통치 기구)

고려 국왕과 공주가 혼인하면서 사위 나라인 부마국이 되었다.

왕실의 호칭과 관제의 격도 낮아졌다.

※공녀※환관을 뽑아 갔고 특산물(금, 은, 인삼, 매 등)을 거두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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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녀}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

※ {환관} 거세를 받아야 하는 일의 종사자인 정부에 고용되어 일한 자

 

[충렬왕] 부마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동행성의 장관을 겸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동녕부탐라총관부도 돌려받았다.

이후 간섭기에 고려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에 포함되었다.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했다.

적 성향이 강하며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여 도평의사사(전 도병마사)를 장악했다.



[공민왕] 기씨 일족을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했으며,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영토를 회복했다.

        왕실의 호칭과 관제를 회복하고,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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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민변정도감} 빼앗긴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과 신분으로 돌려주기 위해 설치한 임시 관서

 

 

그러나 홍건적왜구가 침입하고, 권문세족이 저항하여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고려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인 신진 사대부가 형성되었다.

공민왕 때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였고, 우왕 때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했다.

도덕적 삶을 중시하며 권문세족을 비판했다. 과 화친하고 과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하였다.



권력을 장악한 신진 사대부는

고려를 유지하면서 폐단을 고칠 것을 주장한 온건파

새 왕조를 세워 개혁을 추진할 것을 주장한 급진파로 나뉘었다. 

정몽주온건파를 제거하고 고려 왕조를 무너뜨렸다.

 


 

조선 - 왕권 강화와 체제 안정

 

14세기 이 쇠퇴하고 주원장이 을 건국하였다.

이성계
와 급진파 신진 사대부는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하였다.



[태조 이성계]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정도전※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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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상} 왕을 돕고 감독하는 벼슬 자리

 

[태종] 사병을 없애고 재상의 권한을 약화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양전 사업과 호패법(신분증)을 실시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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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전} 토지의 넓이를 측량하던 일

 

[세종] 경연 제도 활성화,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 각종 편찬 사업 등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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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현전} 학문 연구 기관

 

[세조]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과 경연 제도를 없애 언론 활동을 제한하였다.

통치 체제 확립을 위해 경국대전(법전)의 편찬을 시작했다.



[성종] 홍문관(집현전 계승)을 설치하여 경연을 활성화하였다. 경국대전을 반포하고 통치 조직을 정비했다.

 


 

조선 - 통치 제도

 

조선의 중앙 정치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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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국정 총괄 


[6조] 정책과 행정을 나누어 맡아 전문성, 효율성을 높임

[3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여 8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파견하고, 부·목·군·현을 두어 ※수령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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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령} 각 고을의 지방관, 행정권·사법권·군사권을 행사하며 백성을 지배함.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소를 승격하거나 통합하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했다.

 


 

군사 제도는 양인 남성으로 복무하는 정군과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으로 편성했다.

중앙군5위는 궁궐과 수도를 방위하였고, 지방군은 영과 진을 지키며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초기에는 잡색군을 두어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했다.



교통·통신 제도도 정비했다.

※봉수제를 정비하고, ※역참제를 실시했다. ※조운제를 운영하여 조세(세금)를 한성으로 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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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수제} 봉화를 올려 소식을 알리는 통신 제도

※ {역참제} 공공 업무를 위해 지친 말을 바꿔 타는 기관

※ {조운제}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운송하는 제도

 

관리는 과거와 음서, 천거 등을 통해 등용했다.

과거는 문과·무과·잡과로 운영했다.



교육 제도는 관리 선발 제도와 연결하여 운영했으며, 주로 유학 교육을 강조하였다.

중앙에 성균관과 4부 학당을 두고, 지방에는 향교를 세웠다.

 


 

조선 - 외교

 

조선의 대외 관계

 

이 주변국에 조공을 요구하자 조선, 일본, 대월 등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그 지역의 통치자를 국왕으로 책봉했다.

책봉국은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사대교린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주변국과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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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대교린}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대등하게 교류하는 외교 정책

 

건국 초 태조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면서 과 갈등을 빚었으나 태종 때부터 관계가 회복되었다.

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품을 보냈으며, 에게 책봉을 받고 연호를 사용하였다.

은 답례로 서적, 약재, 도자기 등의 물품을 보냈다.

이렇게 조선은 영토를 확장하고 문물을 수용하는 등 경제적·문화적 실리를 추구하였다.

 


 

조선여진, 일본을 비롯하여 주변 세력과 교린 관계를 맺어 교류했다.

여진과는 국경 지역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제한적인 교류를 허용했다.

약탈을 행하는 경우, 군대를 동원하여 강경하게 토벌했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북방 영토 확장에 나서 태종으로부터 북방 지역의 관할권을 인정받았다.

여진의 약탈이 계속되자 세종 때에는 여진을 내몰고,

압록강 지역에 최윤덕을 파견하여 4군을 설치하고, 두만강 지역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6진을 개척했다.

여기에 남부 지방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토착민을 토관(특수 관직)으로 임명했다.

귀화한 여진족 지배층에게도 관직을 수여하고 토지를 주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정부는 무기를 개발하여 왜구격퇴했다.

왜구 제압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대마도 도주를 통해 막부와 협의하려 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세종 때에는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토벌하고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대마도 도주의 요청으로 제포, 부산포, 염포(3포)의 항구를 열어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했다.

일본과의 교역은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두 나라는 사신을 보내 교류했다.

한편, 조선 정부3포에 거주하던 일본인에 대한 무역 통제를 강화하자, 일본인이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3포 왜란).



그 밖에도 시암(태국), 자와(인도네시아)동남아시아 국가류쿠(오키나와)와도 교류했다.

사신을 통해 각종 토산품과 옷감, 문방구 등과 바꾸어 갔다.

특히 류큐의 사신은 불경, 범종, 유교 경전, 부채 등을 가져갔다.

 


 

조선 - 사화

 

사림의 계보

 

15세기 이후, 사림은 지방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에 힘쓴 사대부들로 정몽주, 길재 등의 학통을 이어갔다.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왕도 정치를 추구했으며, ※향촌 자치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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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존 자치} 그 시골 사람들이 일을 결정하고 해결하는 것

 

이 무렵,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정치권력을 장악했다.

성종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여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3사에 임명하면서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훈구를 비판하자 두 세력의 갈등이 깊어졌다.



연산군은 활발한 언론 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을 탄압하고자 했다.

(오사화) 연산군훈구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사림을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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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의제문}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판했던 글

 

 

(자사화) 연산군은 생모의 폐위와 관련된 훈구사림 세력을 제거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내쫓은 훈구 공신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중종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등용했다.

조광조※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 세력을 강화하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일부 훈구의 공훈을 삭제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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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량과}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마련된 시험

 

(묘사화) 중종훈구가 이에 반발하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이 제거되었다.

(사사화) 명종 때에도 외척 간에 권력 갈등이 일어나 사림이 피해를 입었다.

 


 

사림서원(교육 기관)향약(마을 내 약속)을 기반으로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 중반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사림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을 놓고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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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신 정치} 외적 출신 관료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

 

이조 전랑(관직)의 임명 문제를 놓고 갈등이 더욱 심해져

신진(새로운)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기성(기존) 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붕당(집단)이 형성되었다.



동인척신 정치를 철저히 청산할 것과 정치의 도덕성을 강조했으며, 서경덕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했다.

서인척신이라도 믿을 만한 인물과는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이성혼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한편, 사림공론(의논)을 중시하며 이를 통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강조했다.

중앙에서는 3사의 관리들이 공론 형성을 이끌었고, ※재야의 산림들은 서원 활동과 상소 등을 통해 공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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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야의 산림} 정부 직책에 있지 않으면서, 학문이나 사상 활동에 참여하는 학자나 지식인들


각 붕당의 공론에 따라 정치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나타났다.

붕당 간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견해를 인정하여 상호 비판견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운영되었다.

 


 

조선 - 왜란과 호란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공격하기 위한 길을 빌린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1592).

선조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의주로 피란하여 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며, 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자 일본에 휴전을 제의했다.



3년에 걸친 휴전 회담은 결렬되었고, 일본군이 재침입했다(정유재란, 1597).

하지만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했다.


조선에 대해 '재조지은'이라 하며 숭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성립했다.

일본은 문화를 발전시켰고, 조선 정부는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의 국력이 약화되자 여진이 급속히 성장했다.

 


 

왜란 이후, 광해군이 토지 대장을 정비하고 대동법을 실시했다.

여진누르하치후금을 세우고 을 공격하자, 광해군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강홍립이 이끄는 군대를 에 파견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서인 세력은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으로 세웠다(인조반정, 1623).



서인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친명배금을 내세웠으나, 후금조선을 침략하였다(정묘호란, 1627).

후금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조선은 화의를 맺자는 주화론과 무력으로 대응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했다.

주전론이 힘을 얻어 군신 관계를 거절하자, 청 태종조선을 공격하였다(병자호란, 1636).

조선은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과 강화를 맺었다.

 


 

효종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실행은 못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이 중화 문명의 후계자라고 자부하는 조선 중화주의가 나타났다.



은 국력을 강화하고, 문물을 발전시켰다.

조선에 연행사를 파견하여 문물을 들여와 국내에 소개했다.

18세기경에는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북학론이 제기되었다.



만주 일대에서 조선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양난 이후 중앙 정치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비변사는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임시 회의 기구였으나, 외교, 재정, 인사 등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정부와 6조가 유명무실해지고, 왕권도 약화되었다.



임진왜란 때 훈련도감을 새롭게 설치했다.

17세기 말까지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면서 5군영의 중앙군 체제를 갖추었다.

지방군에는 양반부터 노비까지 포함된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광해군대동법을 실시하여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 무명, 베, 동전 등으로 거두었다.

인조 때 풍흉에 관계 없이 토지 1결당 쌀 4~6두를 전세로 거두는 영정법을 시행했다.

영조균역법을 실시해 농민의 군포(군면제) 부담을 줄여 주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남인이 참여하는 형태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현종 때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두 차례 예송이 일어나면서 붕당 간 대립이 치열해졌다.

숙종 때 집권 붕당이 급격히 교체되면서, 정국이 바뀌는 환국이 나타났다.



이후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노론소론으로 갈라졌다.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나타나면서, 숙종탕평책을 제기했으나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